맥락의 변용 – 주조와 변조 사이

오늘날 사진은 일상의 일부가 되었다. 우선 사진술은 더 이상 특별한 기술이 아닌 일상적인 소통 및 기록 매체가 되었고 다른 하나는 사진의 주제로 오늘의 사진은 특별한 순간이라기보다 평범한 삶을 포착한다. 이제 사진은 특별한 혹은 결정적인 순간만을 기록하지는 않는다. 사진의 일상화는 문자가 아닌 시각 이미지로 기록하는 현상을 만들었으며 현대인이 사진으로 기록하는 순간은 역사적 순간이나 웅장한 스펙터클뿐만 아니라 시시한 것부터 지역적인 것(그 안에 세계적인 것도 함께 한다)까지 포함된다. 이러한 현상이 단순히 디지털 매체의 진화에 의한 것일까? 사진에 관한 행동 양식의 변화 밑바탕에는 미술과 시대, 사회, 문명 간의 긴밀한 관계가 자리 잡고 있다. 고전주의 미술이 종교적 환영, 역사적 순간, 웅장한 사건을 재현했으며 20세기 미술은 규범에 충실한 형식주의를 거절하면서 주관적 해석에 의한 유동적 세계관을 표명했다. 전지자적 시점에서 사적 시선으로 이동한 동시대 미술은 평범하고 익숙한 대상을 주목한다. 양차세계전쟁부터 베트남 전쟁에 이르기까지 보도 사진이 보여준 위태로운 현장은 신화도 목가적 풍경도 아닌 불안한 고통의 순간이었다. 당시 사진이 보여준 현장성은 거대 서사보다 인류에게 보편적인 삶, 자유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부추겼을 것이다. 보편성(universality)은 모더니즘 회화에서도 나타난다. 형상과 거대 서사가 증발한 추상표현주의 회화나 미니멀리즘은 이야기로서의 회화가 아닌 인류 전체에 호소하는 정신적인 명제처럼 여겨졌다. 모더니즘이 제안한 순수함과 추상성의 강령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던 사진은 역사적 순간의 기록 대신 개인의 일상을 고발하듯 노출한다. 이 같은 자전적 성격의 사진은 인생의 굴곡에 밀착되어 있기에 감성적이고 주관적인 성격이 사진에 그대로 드러난다. 이와 달리 특별한 성격을 갖지 않는 건축물이나 사물을 마치 초상사진이나 예술작품사진을 찍듯 중립적인 앵글로 정교한 객관성을 강조하는 뒤셀도르프 유파(Düsseldorf School)의 사진 양식이 등장한다. 작가 자신이 체험하는 삶과 일상을 사진적 순간으로 전환하는 방식은 보편적인 삶이 아닌 특별하거나 소외된 삶, 관습적인 세계가 아닌 실존하는 세계의 다양성을 보여준다면, 중립적 사진(Deadpan Photography)의 경우 건축물, 도시, 세계화와 자본주의에 포획된 현대도시를 인공적 자연으로 보는 일종의 ‘도시풍경’(urbanscape)을 담는 새로운 사진적 형식으로 나타난다. 중립적 사진의 유파를 탄생시킨 베허 부부(Bernd & Hilla Becher)는 소외된 혹은 사회적 기능을 잃은 건축물을 거대한 조각품을 연상시키는 위대한 기념비처럼 흑백 사진으로 기록한다. 세계를 바라보는 이 같은 새로운 시선은 사진 촬영의 형식, 사진을 전시하는 방식, 대상을 이미지로 담기보다 오히려 조각처럼 바라보는 시각을 통한 신 인류학적 관점을 가진 예술 매체로서의 사진 미학을 새롭게 쓰기 시작한다. 수잔 손탁은 사진술이 갖는 기록성의 가치는 회화가 따라갈 수 없는 고유한 것이라 평했다. “어떤 이미지도 현실을 대신하는 힘을 갖지만 그 중에서도 사진은 단순히 이미지(회화와 같은)가 아니라 실재에 대한 해석일 것이다. 그것은 마치 데드마스크 혹은 삶의 궤적을 보여주는 자국과 같은 찰나의 등사판이며 또한 흔적이다.”[1]  모방의 매체(mimetic medium)로써 사진의 정체성은 1970년대를 지나면서 진실을 기록하는 매체에서 미술의 매체로 확장되기 시작했으며 결정적으로 디지털 시대로의 전환은 동시대 사진이 현실에 대한 모방과 재현을 넘어 또 다른 차원의 고유한 사진의 가능성과 가치를 모색하고 있다.
사진이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면 과연 이를 통해 무엇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라는 질문은 모든 사진 작가에게 주어진 공통의 화두일 것이다. 거대 서사에서 소박한 개인의 일상을 담고, 디지털 기술을 이용한 후반 작업을 통해 실재와 가상세계를 혼합하거나, 실재 속에 허구를 삽입하거나 대규모 프로덕션을 이용한 연출 사진에 이르기까지 사진의 모험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박찬민의 사진 세계 역시 위의 경향 속에 놓여 있다. 중요한 점은 이러한 경향 안에서 어떠한 디테일의 차이를 보여주는 가일 것이다. 박찬민은 건물을 찍는다. 주로 아파트와 같은 공동주택이 모델이 되는데 흥미로운 점은 대상에 관한 정보를 나타내는 인덱스를 후반 작업을 통해 제거한다. <친밀한 도시> 연작은 지역적 장소성을 잃어버린 한국 여러 도시의 풍경을 재현한다. 이는 마치 르네 마그리트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의 이미지와 텍스트 사이의 관계를   유사(resemblance)과 상사(similitude)로 구별한 푸코의 사유를 떠올리게 한다. 푸코에게 유사란 모방 개념을 확장한 것으로 여기에서의 닮음은 원본과 관계를 맺는다. 그렇다면 상사란 증식하는 유사한 이미지로 원본을 갖지 않은 개념으로 주어진 규범으로부터 한없이 미끄러진다.푸코에게 상사는 봉건적 구체제의 형식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는 의지를 대신한다고 볼 수 있으며 이는 또한 회화를 실재와 모방이란 고전적 인식체계의 관계를 해체한다. 박찬민이 기록한 한국의 아파트 건축물과 단지는 모던 건축의 유토피아를 재현한다. 이는 유럽의 모더니티가 지시한   새로운 시대성을 반영하고 있지만 한국의 경우 당시의 이상은 합리적인 주거 생활보다는 엉뚱하게도 부의 축적으로 변용되고 말았다.  사회학자의 시선으로 보면 한국의 아파트는 토건 국가의 빈곤함을 보여주는 기표일 터이고, 도시학자라면 몰개성화 된 양식과 자연, 일상, 문화가 단절된 난 개발을 비판할 것이다. 마치 인공물로 구성된 산수화를 보는 듯한 이 헤테로토피아는 복합적인 가치에 대해 묻는 듯 하다. 보통의 한국인이 갖는 아파트에 대한 환상, 그리고 이 환상을 만들어낸 권력, 생존의 욕구와 욕망을 체현하는 삶 사이의 늪에 빠져버린 듯한 현대 도시의 모습은 원본을 갖지 않는 ‘유령’(Phantasmagoria)과 다르지 않다. <Blocks> 전 에서는 서울과 스코틀랜드의 공동주택을 대상으로 삼는다. 건물의 창, 발코니는 물론이고 사람의 모습까지 모두 제거한 사진은 정서적 흔적이 지워진 레고 블록과 같은 규격화 된 조립 부품(module)처럼 보인다. 그는 공동주택의 기표만 제거한 게 아니라 건물의 질감 또한 지워버린다. 틀림없이 녹지, 나무, 하늘, 건물과 좁은 길이 공통적으로 재현되어 있으나 이들은 속이 비어있는 기표로만 존재할 뿐 질감도 부피도 갖지 않은 듯 평면적이다. 짐짓 연극 무대의 세트를 보는 것처럼 감각이 지워진 사진 속 세계는 평면의 구성으로 이루어진 허구적 세계를 재현한다. 반대로 이러한 조형성은 감각의 교환이 점차 사라지는 무균의 아토피아(Atopia)를 기호화한 것처럼 보인다. 박찬민의 사진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평면성과 비물질성은 실재의 등가물로서의 이미지를 수정(retouch)한 과정의 결과로써 실재와 허구의 경계를 흐리게 하는 기제로 작동한다.
이번 전시 <무제>에서는 전위적이거나 키치적인 건축물과 구조물을 찍은 후 그 배경을 삭제하고 형태를 단순화하는 사진을 보여준다. 그의 렌즈에 담긴 대상들은 그간의 보편적 건물이 아닌 특이한 구조와 형태를 갖고 있으며 심지어 비현실적이다. 수평선 위에 우뚝 서 있는 적색 건물, 수면 위로 솟은 기둥을 토대로 건설된 육중한 건물, 환기구처럼 보이는 적벽돌로 만들어진 블록, 기념비인지 제단인지 알 수 없는 백색의 유선형 계단과 탑처럼 솟아오른 형태 등, 이번 전시에 소개되는 대상들은 존재의 이유와 기능 그리고 주변 환경과의 맥락이 사라진 상태로 등장한다. 전작들이 주거의 조건과 삶의 가치관 사이의 관계를 조율하면서 기약 없는 미래의 희망으로 건설된 공동주택을 내용이 사라진 허구적 무대로 재현되었다면, <무제>는 실제로 존재하는 과장된 현실을 통해 실재의 허구성을 비평적으로 포착하고 있다. 우리는 그의 사진‘무제들’을 통해 중요한 질문을 던질 수 있다. 과연 실재란 무엇인가? 내가 현재 마주보고 있는 것은 현실이고 재현된 현실은 가상이 되는 것인가? 우연히 마주하게 된 과장되고 비현실적인 형태의 ‘실재들’은 실재를 비판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실재는 가상적인 세계를 지향하고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수많은 동시대 예술가, 지식인, 행동주의자 들이 실재를 찾거나 밝히기 위해 감행하는 시도는 유의미한 실천적 행동인가, 아니면 돈키호테의 무모함인가? 실재는 현대 철학이 추구하는 질문의 본질이자 궁극의 질문이다. 더불어 이 질문은 사진의 본질적 고민과 겹친다. 다시 모방과 재현의 관계를 해석한 푸코의 사유로 되돌아가보자. 모방의 매체에서 자율성을 가진 미술의 매체로 이동하기 위한 사진의 모험은 교과적인 모방, 아름다운 풍경, 진실의 고발이라는 운명에서 벗어나려 한다.
디지털 시대에서의 사진을 과거 사진술의 관념으로 바라보는 것은 이제 불가능하며 무의미하다. 이는 과거의 패러다임이 무가치하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새로운 패러다임의 등장을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의 전환으로 해석하는 것은 제한적인 해석일 뿐이다. 디지털 사진이 아날로그 사진과 다른 공정을 거친다는 일반적인 지식의 변화를 넘어 사진 자체의 본질이 바뀌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현실의 대상으로부터 끌어낸 사진 이미지는 실재를 증명하는 “주형(mold)이 아니라 변조(modulation)”[2]를 의미한다. 박찬민의 사진은 그 대상(도시, 공동주택, 과장된 현실)과 대상 자체가 갖는 의미보다 대상을 디지털 정보로 전환, 정보를 조작, 변조하는 과정을 통해 이미지-실재로 재현된 가상 실재성을 제안하는 데에 있다. 이는 또한 사진 이미지가 범람하는 시대에서 매체로써 사진의 가능성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 지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박찬민이 우리에게 제시한 세계는 비판이나 풍자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의 모습 속에 잠복하는 욕망의   한계와 그 가능성을 함께 보여준다. 유사한 기원을 가진 하나의 모델이 특정 지역에 적용될 때는 당대의 사상, 지식, 가치관 등에 의해 변용의 과정을 거치게 되는데, 결국은 겉은 비슷하나 서로 다른 문화로 나타나기 마련이다. 박찬민이 관찰하는 것은 도시의 유형학적 차이나 건축적 양식이 아닌 삶을 담는 그릇으로서의 주택, 삶의 바탕으로서의 도시에 더욱 가깝다. 그의 궁극적 물음은 삶과 그 무한의 가치이기 때문이다.
정현(미술비평)
[1] Susan Sontag, Sur la photogaphie, tr. Fr., Christian Bourgois Editeur, 1993, 2000, p.182
[2] André Rouillé, La Photographie, Gallimard, 2005, p.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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