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하학적인 정글

박찬민의 ‘공간의 포위 (Surrounded by Space)’ 전은 공간과 공간이 겹쳐서 포위당한 듯한 도시경관을 보여준다. 그것은 가히 기하학적 정글이라 할만하다. 겹겹이 에워싼 건물들은 대지와 하늘을 뒤덮고 인간의 흔적마저 사라지게 한다. 가히 괴물적 생태계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그의 도시풍경들은 과연 저곳이 우리가 살고 있는 장소인가 하는 의구심을 준다. 진공 팩에 압착되어 있는 것처럼 공기의 느낌이 없는 그곳에서 인간들은 숨 쉬고 살 수 있을까. 그런 납작한 세상에서 인간들 역시 납작한 미생물 같은 존재가 아닐까. 납작한 동물은 자신이 속한 납작한 세계를 무한으로 체험한다. 이렇게 압착된 세계에서 저편에 보이는 건물로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흔히들 그렇듯이 자동차와 승강기를 이용한 재빠른 수평, 수직 이동이 요구될 것이다. 신속한 이동에 방해가 되는 것들은 퇴출된다. 자연, 인간, 환경 등과의 불필요한 접촉은 배제되어야 한다. 그런데 모든 이가 같은 수단을 이용하면, 속도전에 동참하면 속도가 저하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사진에 의해 순간 멈춤 된 장면은 묵시록적 과정의 단면이다. 박찬민의 도시풍경은 과도하게 현실적이어서 초현실적으로 보이는 지점들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이 바로 이렇다는 비판적 지점을 가지지만, 동시에 적나라하게 까발려진 진실을 직시할 때의 심미적 쾌감도 준다. 좀 다르게 보일 뿐, 여전히 현실에 바탕 한 현실을 지시하는 그의 사진은 분명한 참조대상을 가지기에 비판적일 수 있다. 그런데 익숙한 도시적 삶에 거리를 두는 방식이 거리감의 상실이라는 점이 역설적이다. 거리감의 상실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여분의 차원이 없이 주어진 하나의 차원 안에 매몰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마냥 행복한 현실이면 상관없지만, 대체로 그렇지 않기에 매몰은 죽음의 징후이다. 그러나 박찬민의 작품들에 나타나듯이, 거리가 극단적으로 상실되면 다시 거리가 생겨난다. 우리가 동질화하고 있는 세계는 이질적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작가는 현대인이 이미 세뇌되고 중독되어 감지할 수 없는 모순을 가장 흔한 대상을 통해 드러낸다.
이 전시에서 박찬민은 몇 가지 시리즈에 집중하지만, 그가 선택한 것은 지엽적 소재가 아니라, 일종의 시스템이다. 인간의 상징적 우주에서 거주지가 차지하는 위상을 생각할 때, 그것은 현대 사회의 일부를 담은 단편이지만 결정적 단편이다. 그러나 각 단편이 충만하지 않다는 점에서 자족적 단편은 아니다. 작가는 사진이라는 단편에 수많은 단편을 모아놓는다. 단편들은 유기적 총체성을 결여한 채 서로의 모서리를 찌르면서 덜그덕거린다. 이러한 불편함과 이상함은 그것들이 가장 익숙한 것들이기에 더욱 강조된다. 그러나 이 이상한 도시 풍경이 많은 변형이 가해진 결과는 아니다. 그것은 상상이 아닌 현실이다. 그의 작품은 인간의 눈과는 차이가 있는 사진적 시점에 충실하다. 사진 역시 그림처럼 3차원을 2차원에 넣는 기술이며, 궁극적으로 평면적이지만 작가는 사진의 속성과 평평화 되고 있는 세계를 중첩시킨다. 모든 것의 즉각적인 소비를 위해 바짝 당겨지고 상호간섭 또한 극대화된 세계는 평평하다. 모든 것이 상품, 또는 코드가 되어 일렬로 정렬될 수 있는 시대는 평평하다.
평평함은 시간과 공간이 압축된 결과이다. 압축은 내파를 부른다. 세계화를 통해 지구상의 다양한 공동체들이 무한경쟁 하는 공간의 수축이 일어났다. 그 공간을 채우는 시간 역시 균질화 된다. 지리학자 데이비드 하비는 [포스트모더니티의 조건]에서, 시공간의 압축이 가속화되는 과정에서 포스트모던 조건이 형성되었다고 말한다. 박찬민의 도시풍경은 시간공간의 압축에 의해 마치 꼴라주같이 보인다. 변증법적인 변형을 야기하는 꼴라주라기 보다는, 조그만 빈틈도 없이 파고드는 모자이크에 가까운 꼴라주다. 평평한 세계는 추상적 시각성이 지배한다. 2차원성이 강조된 건물들은 그곳들이 실제로 사는 곳이기 보다는 보고/보이는 곳임을 강조한다. 여기에서 모든 것은 서서히 파악되는 것이 아니라, 한눈에 파악되어야 한다. 도시에서의 상호작용은 시각적이다. 시각은 즉각적이다. 서로의 표면만을 바라보는 익명적 시선들이 지배하는 현실은 접촉이나 참여를 배제한다. 평평하게 보이는 세계는 매우 낯설다. 그러나 박찬민의 낯선 도시경관에서 구조자체를 변경하는 일은 없다.
글자나 창문을 지우는 등의 간단한 조치가 전부이다. 그의 작품에 보편 내재하는 것은 최대한 많은 상품정보인간을 끼워 넣을 수 있는 수직/수평의 구조이다. 그러한 구조들이 확장되어 그리드를 이룬다. 그것은 명확한 좌표계를 통해서 대상의 위치(가치)를 파악할 수 있게 한다. 그리드 구조는 기존의 구조들에 덧대어 증식을 거듭한다. ‘도시라는 공간의 일반적이며 보편적인 성향에 주목’ 한 이 전시는, 특히 ‘공간과 구조를 구성하는 기본요소인 선과 선이 만나고 면과 면이 겹치고 선과 면이 혼재되는 장면들을 단순화되고 도식적인 시선으로’ 바라본다. 박찬민은 사진을 통해 그 구조를 재현할 뿐 아니라, 구조를 재배치한다. 배치는 보다 아름다운 풍경, 또는 보다 괴상한 풍경을 연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구조를 좀 더 리얼하게 느끼게 하기 위한 형식적 장치이다. ‘공간이 사회적 권력을 담는 그릇이라면 공간 재조직은 언제나 사회적 권력이 표현되는 틀을 재조직하는 것’(데이비드 하비)이다.
박찬민에게 배치는 물리적 이동이 아니라 절묘한 시점의 선택에 의거한다. 포토샵이 많이 사용되지 않는 이유는 허구보다는 현실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복잡한 실루엣으로 엉켜있는 도시의 정글 숲에서 찾아낸 어느 시점에서 도시는 자신의 진면목을 드러낸다. 박찬민의 사진적 해석에 의하면 현대도시의 공간은 극도로 압착되어 있다. 공간과 시간의 연결성을 생각해 본다면 시간 또한 마찬가지다. 빠른 소통(더 정확히는 유통)을 위해 현재는 무한히 확장되고 전후 관계를 따지는 것도 힘들어진다. 도시가 처음부터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처음에 건물이 대지로부터 수직으로 솟아올랐을 때 영웅적이고도 기념비적인 위상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곧 자본의 논리에 따라 수직 수평의 양방향에서 무한증식 했으며, 이는 지구촌 어디에서나 통용되는 보편적인 문법이 되었다. 약간의 지방색이 있지만, 특히 한국에서 극단적이다. 작가에 의하면, 유럽에서 아파트는 ‘종합병동, 감옥’으로 불리우는 실패한 근대적 기획으로 평가되며, 낡은 건물이 허물어지면 그 위에 또 아파트를 짓지는 않는다.
반면 한국은 5-6층 아파트만 되도 허물고 몇 십 층짜리로 다시 짓는 것이 순서 아닌 순서가 되었다. 박찬민의 창문 없는, 곧 눈 없는 대상들은 이러한 맹목(盲目)을 상징하는 듯하다. 시스템이 욕망을 낳고 욕망이 다시 시스템을 부추키는 순환 고리 속에서 ‘아파트 공화국’이라는 괴물적 생태계가 탄생했다. 양 대륙에서 아파트에 대한 시각차는 단지 아시아의 높은 인구밀도가 낳은 기능적 차원일까. 폐허로부터 시작된 역사가 낳은 새것 콤플렉스인가. 시공간의 압착은 가속도를 붙여 이제 더 이상 끼워 넣을 곳도 없는 과포화의 지경에 이르렀다. 수평적 과포화를 넘어서 수직적 과포화까지, 그의 어떤 작품을 보면, 인간의 인공구조물이 얼마나 조밀하고 중첩되어 있는지, 하늘은 단 한 뼘도 할애되어 있지 않은 것도 있다. 스카이라인 역시 경직되어 있다. 유리건물끼리 난반사하여 더 평면적으로 보이는 작품 [Urbanscape 71](이하 작품 번호만 표기함)에서 하늘도 기하학의 일부분이 된다. 토대 또한 붕 떠 있다. 작품 [1]를 보면, 빽빽하게 들어찬 빌딩 숲 아래의 축구하는 아이들이 있는 빈 공간은 도시가 자연이 아닌 추상적인 공간에서 파생한 느낌이다.
건물이 물질적 실재감을 가지려면 자연에 뿌리를 두고 자라듯이 서 있어야하지만, 작가는 토대 부분의 밀도를 현저히 떨어뜨린다. 거의 텅 빈 것처럼 보일만큼. 작품 [101]에서 건물은 아래의 회색 펜스 위로 걸쳐있는 듯이 보인다. 위태롭게 보이는 기이한 중첩은 작품 [3]에서 어떤 건물 옥상위에 물, 물 위에 작은 바위 섬, 섬 위에 건물이 배치된 것에서 극단화된다. 적정 수준이 넘는 증식에는 원칙이라는 것을 찾을 수 없다. 빈 시공간을 파고드는 어떤 힘의 맹렬한 독주만이 감지될 뿐이다. 작품 [13]에서는 이미 과포화 된 풍경 뒤로 더 높이 올라서는 건물들이 보이며, 작품 [48]에서 오래된 건물과 새로 짓는 건물은 뒤죽박죽이다. 인공구조물의 맹렬한 증식에 비한다면, 자연은 거의 플라스틱 모형 수준이다. 작품 [17]에서 빌딩 사이의 빈약한 나무는 시멘트 덩어리에 에워싸여 힘없이 꽂혀있다. 공간을 잠식하는 고층건물들은 주변을 사막화한다. 그것들은 주변과 단절되어 있는 고립된 섬이다. 작품 [56]에서 하늘은 전혀 보이지 않으며, 작품 [72]에서 마주본 건물의 피막을 통한 반사만이 공간이 암시될 뿐이다.
벽돌로 쌓인 건물 창문으로 보이는 상품들이 보이는 작품 [37]은 빽빽한 사각형 구조물들안에 무엇이 있는지를 암시한다. 그것은 도시자체가 대량생산과 소비를 위한 장소임을 알려준다. 이러한 도시 공간 속에서 인간은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빌딩 창문을 청소하는 사람이 빌딩 사이에 매달려 있는 작품 [42]에서 알 수 있듯, 숨은 그림처럼 찾아낸 그것들은 그림자처럼 존재감이 미미하다. 거의 무인지경의 풍경에 대해, 작가는 일부러 사람을 지우진 않는다고 말한다. 작가가 위치한 곳이 대개 사람 잘 안보이고, 찾으면 있지만 보이지 않는다. 작가는 도시에서 인간이 그만큼 작다고 말한다. 그것은 작가의 관심이 인간이 아닌 (도시)구조에 있음을 알려준다. 도시는 자체의 생존을 위해 존재하는 곳이지 인간을 위한 곳이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은 도시 자체를 위한 부속품에 불과하다. 박찬민의 사진은 추상적인 매트릭스의 공간을 우리의 일상적 공간에서 찾아냈다.
작품 [86]에서 빌딩 숲 화면 중앙에 포착된 발코니는 개인의 공간이란 것이 사막 같은 도시를 볼 수 있는 작은 지점에 불과하다. 도저히 시선이 주파할 수 없는 중첩된 공간에 서식하는 인간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좀 더 그럴듯한 환영에 심취하는 것이다. 도시는 점차 스크린이 돼가고 있고, 그에 마주하는 인간은 시청자나 관객 즉 각종 메시지가 수신되는 말단이 된다. 기 드보르가 [스펙타클의 사회]에서 말하듯이, 구경꾼 의식은 평평한 우주에 수감되어 있고 그 뒤쪽 면에 자신의 삶이 유배당해 있는 스펙타클의 스크린에 의해 묶여 있다. 박찬민의 작품에서 크고 작은 스크린들은 끝없이 경합한다. 자잘한 건물위에 위압적으로 ‘CGV IMAX’라는 간판을 달고 있는 작품 [68]은 도시가 스펙터클의 장임을 암시한다. 도시의 풍경은 마치 영화의 필름이 그러하듯이 분리된 채로 결합돼 있다. 기 드보르가 말하듯이 이미지들에 의해 매개된 사람들 간의 사회적 관계 또한 그렇다. 화폐의 다른 면이기도 한 스펙터클은 우리가 그 안에 붙잡혀 있는 역사적 운동이며, 인간과 인간간의 분리와 소외의 표현이다.
작품 [73]의 겹쳐진 풍경들에서, 시선이 더 이상 공간을 주파할 수 없는 단계에서는 표면들의 질감의 중요함을 알려준다. 거리가 상실된 공간에서 차이는 시각적 촉각에 의해 감지될 수 있다. 박찬민은 도시의 정면이나 표면을 찍지만, 그것은 동시에 도시의 이면이고 내부이다. 통상적으로는 잘 보이지 않을 풍경이 있는 작품 [82]에서 도시는 겉보기와 달리 무질서하고 무원칙적이다. 박찬민의 도시경관을 이루는 요소들은 블럭으로 압축될 수 있는 건물들이다. ‘도시경관(Urbanscape; Surrounded by Space)’ 시리즈에서 블럭들은 더욱 압착되어 평면화 되었다. 아파트나 공동주거 형태의 건물에서 창문을 지운 ‘Blocks’ 시리즈들에서 창고, 컨테이너, 공장 같은 건물과 집은 거의 구별되지 않는다. 자연을 극복하기 위한 프로젝트들은 대개 황량한 자연을 깔고 있다. 그것은 사막화를 촉진시킨다. 잔디 위로 회색빛 하늘을 수직으로 가르는 하얀 건물이 있는 작품 [블럭1]에서 수직의 인공구조물은 주변의 환경에 비해 하얀 종이처럼 보일만큼 평면적이다.
작은 큐브들이 웅기종기 배치되어 있는 유럽의 마을 사진들은 한국의 고층아파트 사진에 비하면, 그래도 인간적이며 적정 규모를 가지고 있는 듯하다. 창은 안과 밖을 이어주는 통로로 일종의 눈 같은 기능을 가지는데, 창이 제거되었다 함은 안/팎의 소통이 차단된 상태를 말하며, 이러한 차단은 편집과 분열 같은 광기를 불러올 것이다. Blocks’ 시리즈에서 창은 제거되어 있지만, 상표는 제거되지 않았다. 아파트로 대변되는 주거공간의 핵심은 그것의 상품성이기 때문이다. 아파트 동수나 상표만 남아있는 길쭉길쭉한 수직 구조물들은 찍으면 바로 가격이 뜨는 바코드처럼 보인다. 그것은 표준화된 시스템에 의해 생산된 규격화된 제품의 면모를 보여준다. 창문이 제거된 건물들은 잘못된 수요예측으로 과잉 공급되어 불이 다 꺼져 있는 아파트들도 떠오른다. 아파트로 점령된 한국은 한 종이 지배하는 병적인 생태계와 비교할 수 있다.
대량생산과 소비 시스템의 산물인 아파트는 편리와 기능이 앞세워진다. 대규모의 고층 주거단지들은 마치 원자력 발전소처럼 단기적인 경제성을 위해 장기적인 ()소비와 관리가 필요하다. 그것은 경제적인 면에서도 결코 지속가능한 주거형태가 아니다. 자본의 요구가 도시에 집중된 삶을 원했지만, 시스템은 그렇게 모여든 이들을 지속적으로 탈각시킨다. 어디서나 집중은 과도한 경쟁을 낳고, 동시에 더 많은 잉여를 생산한다. 도시에서는 소비 외 엔 할 일이 없다. 거기에서는 궁극적으로 소비밖에 할 수가 없는데, 소비를 할 수 없다면 그 때가 바로 유토피아가 디스토피아로 전환되는 순간이다. 박찬민의 작품에서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는 멀리 떨어져 있지 않으며, 한끝 차이다. 고층빌딩으로 가시화된 집단 거주지는 그러한 소비 메커니즘의 전초 기지라 할 수 있다. 건물의 옥상에서 바라본 창문 없는 아파트를 표현한 작품 [블럭 30]에서는 ‘도시경관’ 시리즈에서처럼 건물의 토대를 약화시킨다. 또한 그것은 여기에서 바라보는 저기의 풍경이나, 저기에서 바라보는 여기의 풍경이 비슷할 것임을 알려준다.
도시는 소비로만 탈주(그러나 순간적인 기분전환에 머무르는)할 수 있는 진부함을 생산하는 곳이다. 집단 거주지 역시 생산된 순간부터 짧은 내구연한을 새기고 있는 상품의 논리를 가진다. 이러한 논리는 소비가 아닌 소비의 축소를 재난으로 간주한다. 생산성의 향상만을 향해 발전해온 현대사회는 뭔가 시한폭탄 같은 것을 내장하고 있다. 작품 [블럭 32]에서 다닥다닥 붙은 다세대 건물 뒤로 다시 다닥다닥 붙은 아파트가 자라나고 있다. 개발의 전과 후라고 할 만 한 광경이 동시에 있는 것이다. 두 가지 공간의 병치가 말하는 것은, 미래라는 시간은 저 공간에 있고 과거라는 시간은 이 공간에 있다는 발전주의적 환상이다. 여기에서 시간은 공간화 된다. 블록은 개인을 원자화시키는 차단벽을 떠오르게 하지만, 박찬민의 작품은 도시에서의 소외만을 말하지 않는다. 소외란 인간과 환경을 반대 항으로 놓으며, 그러한 대조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근대의 산물이다. 그의 작품은 근대가 양적 폭주를 넘어서 질적인 차원으로 변이하는 시점을 포착한다. 개발은 자본의 이익에 따라 움직이지만, 이러한 구조는 또한 욕망의 결과다.
구조와 욕망은 상호작용을 넘어서 점차 구별하기 힘들어진다. 우리는 욕망의 구조와 구조의 욕망을 말해야 한다. 자본주의의 헤게모니가 유지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표준화 및 그에 적합한 주체의 생산이며, 아파트를 비롯한 현대의 고층건물은 그러한 주체의 욕망이 집약된 것이다. 상호간에 배타적이면서도 서로 맞물리는 구조들은 마치 서로를 비추는 거대한 감옥 같아서, 이러한 구조들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낳는다. 작가들은 구조들을 근접시켜 그 유사성을 드러내며, 구조들이 서로 맞부딛혀 서로를 무화하는 배치를 찾아낸다. 폐쇄되고 추상적인 구조에 의존하는 삶을 상대화시킨다. 그것은 지금 여기를 지배하고 있는 보편적 어법에 대한 상대화를 말한다. 펠릭스 가타리는 [기계적 무의식]에서 언어의 보편성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지배적 언어란 하나의 사회집단에 의한 기호적 권력의 장악이라는 현상에 불과하다. 박찬민은 지금 여기를 지배하는 보편적 문법을 활용하면서도 그것을 가속화시켜 무화한다. 가령 그의 작품에서 각 건물은 일관성을 갖추고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들이 엉켜있는 지점들을 부각시킴으로서 연속적인 코드화를 단절시킨다.
박찬민의 작품은 ‘보편의 존재가 이질적인 지층간의 우연적 관계에 의존’(가타리)함을 보여준다. 현대사회를 지배하는 구조나 체계로부터 탈주하려는 동일한 목적을 가진 [기계적 무의식]에 의하면, 언어의 구조는 ‘차용, 혼합, 접착, 오해로 이루어져 있는 일종의 헛간이 화석화한 것에서 생기는 것’이다. 정합성이란 ‘모든 방향에서 끌어들일 수 있는 배열체계 혹은 모든 방식으로 해석할 수 있는 규칙 체계’를 발견하는 것이다. 작가는 현대의 삶을 틀 짓는 구조를 가시화하지만, 동시에 그러한 구조들이 사실상 다양한 부품들이 조립되어 작동하는 것임을 보여준다. 구조들이 조립된 것 인 한 변형될 수 있고, 더 나아가 해체될 수도 있다. 작가는 다른 사회적 배치와 다른 기계적 결합을 생각한다. 배치는 ‘다양한 구성요소들을 포함하며 코드와 영토성에 의해 고정되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흐름들을 생산해 내는 틀’(들뢰즈와 가타리)이다. 구조 대신에 배치를 강조함은 무엇인가를 의미화하고 소통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작가가 배치를 만들어낸다 함은 어떤 상황의 특이점을 파악하기 위한 것이다.
이선영(미술평론가)